기억이 걸쳐질 장소가 사라진 도시, 기억하기보다는 잊어야 하는 지금. 조각난 것들이 쌓이다가 허물어지고, 무질서하게 흩어져버린다. 그 조각들을 맞출 수 있는 ‘판’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집조차 없어 이리저리 부유할 수밖에 없는데 집이 있던 자리마저 붕괴해버리곤 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시공간과 함께 기억도 조각난다. 말할 수 없는 기억, 잊어야 할 기억이 늘어난다. 깨어져 맞물리지 못한 조각들을 혼자 안고 궁글릴 때, 심장 한쪽이 아파서 가끔 어깨를 움츠린다.
< 더듬거리는 몽타주 >는 시각적으로 신화화된 ‘기억’을 해체한다. 기억이 묻어있는 장소들은 붕괴되어 사라진 도시에서 우리가 기억하는 장소는 오직 스스로의 몸뿐이다. 말로 나오지 않고, 나오지 않게끔 깊숙이 묻은 암흑상자 같은 어딘가를 더듬거려서야 겨우 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다. 따라서 ‘더듬거리기’는 기억하기의 신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프루스트는 마들렌 한입으로 온갖 기억과 환상을 한꺼번에 쏟아냈던 건, ‘먹는 일’과 같이 무언가가 신체와 만나 침투된 사건이 기억을 우연하게 해방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들렌 같은 행운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진 작가는 마들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 ‘보는 행위’에 일어나는 자그마한 사건들을 관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눈 깜빡임’에서부터다. ‘깜빡임’은 눈을 더듬는 행위다. 보기 위한 기관에 생명의 리듬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이 행위를 통해서 풍경은 조각난다. 눈꺼풀이 눈을 덮는 순간, 하나의 커트(Cut), 암흑상자 속에 갇힌 동안 우리는 방금 지나간 몸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그 기억의 조각을 더듬고서야 다시 앞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보는 일에는 기억이 불가결한데, 이것들을 연속해서 맞출 수 있는 지반이 없는 것이다.
장소가 사라진 도시를 사는 일이란, 더듬거리며 눈앞을 몽타주하는 일이다. 비록 금세 무너져내릴지라도, 또 다시 조각들을 중첩하고 쌓아가면 조각난 파편들이 언젠가 땅이 되고 장소가 되리라. 광주 월산동과 전주 덕진동에서 만나고 오가고 더듬거리는 동안 이곳이 만들어진 것처럼. (글_김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