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는 우리에게 강요된 장소이며, 우리는 신체로부터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신체가 절대적인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체는 언제나 다른 곳, 다른 존재에 연루되어 있다. 신체는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신체 안팎에서 발생하는 타자와의 교류는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와 '나와 다른 것'과의 접촉은 한 신체에 활력을 가져다주기도, 한 신체의 일부에 괴사나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다. '나'와 '나와 다른 것' 사이의 역량 차이는 우리의 실제적·상상적 관계 내에 폭력과 갈등의 역사가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받아들인다. 이 수용 과정에서 우리는 면역 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것, 나와 본성이 다른 것, 자신에게 유해하다고 상상하는 것과 접촉을 기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회피나 우회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의 삶에 강제적으로 침입하는 낯선 것이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향해 강박적으로 나아가려는 생명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우리의 신체는 항상 유동적인 상태 속에서만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다. 순수한 통일성은 외부와의 단절로만 가능하며, 이때 생명의 넘쳐나는 힘은 자기를 파괴하기 위해 작용한다. 신체 바깥과 교류가 중단된다면, 즉 이질적인 것이 다가올 수 없다면 생명은 더 이상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오롯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외부의 타자에게 부분적으로 생명/삶을 빚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시로 이루어지는 침입자의 방문을, 주체로서 타자가 제기하는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법-권리의 바깥에서 도래하는 문제를 어떻게 피하지 않고 마주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타자의 손 안에 존재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마주침과 신체의 면역 체계에 대한 의문은 곧 나와 타자가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지, 그 존재 양식을 규정하는 법-권리와 정의가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타자에 대한 질문은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짝을 이룬다. 만약 공동체가 개인의 확장이 아니라 고유성의 부재 또는 주체성의 중단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면, 그리고 언어·민족·인종·문화라는 내용을 기원으로 공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결핍에서 구축된다고 한다면, 공동체는 언제나 '자기'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다. 공동체의 불완전성은 생명/삶의 보존을 위해 우리가 바깥으로 노출되고 끊임없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나타낸다. 안과 밖의 개념이 뒤바뀔 수 없다면 면역 체계는 스스로를 겨냥하고 만다. 전시의 쟁점은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 그것은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 불합치와 부정성의 차원이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우리의 손에 주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역량을 능가하거나 초월하는 다른 무언가에 에워싸여 있으며, 타자의 일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항시 영향을 받으며, 우리에게 영향을 준 타자 역시 다른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사이클로스포린》은 내부와 외부의 대립에서 공동체를 다루는 일반적인 문법과 단절하고 그 너머를 상상한다.